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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소설, 지나간 사람들, 남은 사람들"

저자 최은영 | 출판사 문학동네 | 제품ID 1553919405
출판일2018.06.30 | 페이지 328쪽|ISBN 978895465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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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기도 A시의 아주 작고 평화로운 빌라 2층에서 나고 자랐다. 친구 집의 문턱을 건너는 것이 어렵지 않으면서도, 깊은 우정은 비로소 학원에서 쌓이는 학창시절이 인생 8년 차에 시작되었다. 언젠가는 전자만 가능했고, 지금은 후자만 가능하므로 아마 나는 무척 애매하게 살아왔으며, 그리하여 지금도 애매하게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에 나는 M, 그리고 H와 붙어 다녔다. M의 집에는 신기한 '신상' 장난감이 많았고, H의 집에는 쾌적하고 세련된 공기가 흘렀다. 책상 밑에 들어가고 싶은 날에는 M의 집에 놀러갔고, 날씨가 좋아 해가 잘 드는 날은 H의 집에 놀러갔다.
 
M과 H와 더 깊이 붙어다닐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모두 같은 학원엘 다녔기 때문이다. 반 배정이 되는 시기엔 같은 반이 되게 해달라고 셋이 손을 모아 기도했지만, 10개는 거뜬히 넘는 반에 학생들이 40명씩 들어차던 시대였다. 모두 함께 같은 반이 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같다고 느껴졌다. 그리하여 우리의 우정은 같은 학원에서만 지속될 수 있었던 것. 그곳은 일종의 '글'을 쓰는 학원이었는데, 나는 M과 옆자리에 앉기도, H와 옆자리에 앉기도, 어떤 날은 그 누구와도 같이 앉지 못했다.
 
세상에는 어쩜 그렇게 짝수로 해야할 일이 많은 것인지. M 그리고 H와 친하게 지내면서 나는 홀수의 친구들 중 한 명이 느낄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슬픔과 고립에 대해 절절히 느꼈다. 우리는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를 하기도 했고, 어느 날은 시기심에 둘 씩 짝을 지어 험담을 하기도 했으며, 또 어떤 날에는 한 명이 쿨한 척 양보를 하기도 했다. 홀수가 만드는 헤아리기 어려운 다양한 마음을 나이가 두 자리가 되기도 전에 이미 다 느껴버린 것이다.
 
/
 
최은영 작가의 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 가운데 '모래로 지은 집'은 천리안 'B고등학교 99년 입학생 모임'에서 만난 세 명의 친구 - 나비, 공무, 모래 - 들의 우정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이다. 20대 초반을 깊은 사이로 함께 보낸 셋은 각자의 마음을 '무슨 물렁한 반죽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금씩 떼어(p.131)' 주면서, 서로가 서로의 '일부를 지닌 셈(p.131)'으로 밀도 있는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제각각의 사연과 감정으로, 제각각의 결단과 판정으로, 그 때엔 미처 알지 못했던 미숙함으로, 서로에게 준 상처로, 결국엔 그 때를 자주 떠올리지도 않는 서른다섯의 어른이 되어버린다.
 
비슷한 형태로 잃은 사람들이, 흘려보낸 시기가 얼마나 되나. 눈을 감고 헤아려보면 당장 M과 H가 엄지와 검지를 차지하고, 곧 손가락 열 개가 부족하다 느껴진다. 내게 M과 H는 단지 최초의 기억일 뿐, 더 적지 못하는 부끄럽고 아픈 사람과 기억이 여럿이다. 마음은 아마도 정말 반죽 같은 것이어서, 점점 더 말라가고 굳어만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마음의 점성은 어느 정도인가. 상처를 받고, 고통을 주는. 그러니까 결코 무해(無害)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당장 마음을 떼어줄 수 있는 상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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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누구든 적당하게 거리를 두고, 느슨하게 만나면서 편하고 싶다. 하지만 늘 명치께를 건드리는 것은, 시간이 지나도 깊숙한 곳에 오래 오래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리를 둘 새도 없게 하는 사람들. 복잡한 머리와 가슴으로도 기꺼이 만나러 가도록 만드는 사람들이다. 서로를 여러 방식으로 해(害)하면서도, 서로를 사랑해서 괴로운 사람들. 끝끝내 남는 것은 그런 사람들이다.
 
나는 이제 M과 H가 어떻게 사는지 하나도 알지 못한다. 그래도 6년을 나눈 마음은 여기 이렇게 남아 노란 빛의 책을 꺼내들면 귀여운 토끼 이빨을 한 M과, 포니테일이 잘 어울리던, 봉긋한 이마의 H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지나가버린 것 중 정말로 남는 것은 고작 이런 것 뿐인지도 모른다.


출판사 서평

미숙했던 지난날의 작은 모서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

『쇼코의 미소』의 작가 최은영 신작 소설집
2017 젊은작가상 수상작 「그 여름」 수록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문장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은 소설을 쓰는 작가”(소설가 김연수), “재능 있는 작가의 탄생을 알리는 소설집”(소설가 김영하)이라는 평을 받은 강렬한 데뷔작 『쇼코의 미소』 출간 이후 2년 만에 두번째 소설집을 선보인다. 2016년 12월, 그해 나온 국내외 소설을 대상으로 소설가 50인이 뽑은 ‘올해의 소설’에 선정되는 등 문단과 독자 모두에게 뜨거운 지지를 받아온 『쇼코의 미소』는 10만 부 돌파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신인 작가의 첫 소설집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러한 사실이 작가에게는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했을 터. 한 인터뷰를 통해 “소설이 더 발전하는 건 헛된 기대라고 생각하지만 지금보다 노력은 더 많이 하고 싶어요. (…) 오래 쓰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라고 밝힌 것처럼, 이 젊은 소설가는 2년 동안 한 계절도 쉬지 않고 꾸준히 소설을 발표하며 자신을 향한 기대와 우려 섞인 시선에 ‘소설’로써 응답했다. 그렇게 발표한 일곱 편의 중단편소설을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매만지며 퇴고한 결과물이 『내게 무해한 사람』이다.
특정한 시기에 여러 번 듣게 된 노래에는 강력한 인력이 있어 그 노래를 다시 듣는 것만으로도 당시의 기억이 함께 이끌려 나온다. 『내게 무해한 사람』에 실린 일곱 편의 작품은 재생 버튼을 누르는 순간 잊고 있던 어떤 풍경을 우리 앞에 선명히 비추는, 한 시기에 우리를 지배했던 그런 노래 같은 소설들이다. 그렇게 불려 나온 풍경의 한편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히 멀어진 사람들―그 시절엔 붙어다니는 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던 친구와 연인, 자매와 친척 들―이 자리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런 시간의 흐름에도 마모되지 않은 마음이 박혀 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오해와 착각, 독선과 무지로 멀어지게 된 한 시절이 담겨 있다. 최은영은 이 미숙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인물들의 내면을 비추며, 그 안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잦아드는 마음의 흔들림을 섬세하고 정직하게 써내려간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우리는, 과거는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위치에서 끊임없이 재조정되며 다시 살아나는 것임을, 기억을 마주한다는 건 미련이나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단단한 용기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제대로 마주하게 된 그 시절과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그때의 마음
그 단단한 시간의 벽을 더듬는 사이 되살아나는
어설프고 위태로웠던 우리의 지난날


이번 소설집의 제목인 ‘내게 무해한 사람’은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고백」)라는 문장에서 비롯되었다. 고등학생 때 만나 단단한 울타리 안에서 내밀한 감정을 공유하며 가까워진 미주와 진희. 미주는 진희가 타인의 감정에 예민하기 때문에 자신을 포함한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을 거라고, 진희가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여기며 그 사실에 안도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은 이 안도와 행복이 얼마나 허약하고 오만한 인식 위에 세워진 것인지 드러내며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는 제목의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다. “미주의 행복은 진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진희가 어떤 고통을 받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으므로 미주는 그 착각의 크기만큼 행복할 수 있었다.”
그 시절 행복할 수 있었던 건 상대의 고통을 외면했기 때문이라는 자각. 지난 시절을 회상하는 인물의 목소리가 쓸쓸하게 들리다가도, 돌연 자기 자신을 몰아치듯 엄정한 태도를 획득하게 되는 건 이 때문이 아닐까. 즉 최은영의 소설에서 인물들이 과거를 불러내는 건 단순히 아름답던 그 시절을 추억하기 위함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된 어떤 진실을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서다. 지난 시절을 낭만화하지도, 자기 자신을 손쉽게 용서하지도 않아야 도달할 수 있는 이 깨달음은 이번 소설집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다.
소설집의 문을 여는 「그 여름」은 사랑에 빠지기 전의 삶이 가난하게 느껴질 정도로 상대에게 몰두했지만 결국 자신의 욕심과 위선으로 이별하게 된 지난 시절을 뼈아프게 되돌아보고, 「모래로 지은 집」의 화자는 이십대의 한 시절을 공유했지만 끝내 멀어져간 이들과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단순히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된 것이 아니라고, 그 헤어짐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런 자각 앞에서도 우리는 끝내 따스함을 느끼고 위로를 건네받게 되는데, 그건 우리 모두 한 번은 어설프고 위태로웠던 그 시절을 지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미숙함 탓에 상처를 주고받기도 했지만, 사람에게서만 받을 수 있는 위로가 있다는 것을, ‘나를 세상에 매달려 있게 해준다는 안심을 주는 존재’ 역시 그 시절 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함께 성장해나갈,
우리 세대의 소설가를 갖는다는 것


레즈비언 커플의 연애담(「그 여름」), 억압적인 가부장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온 두 여자아이의 이야기(「601, 602」), 악착같이 싸우면서, 가끔은 서로를 이해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두 자매의 이야기(「지나가는 밤」) 등 『내게 무해한 사람』에는 다양한 관계, 특히 여성들의 관계가 집중적으로 그려져 있다. 여성들의 사랑, 자매간의 애증, 숙모와 조카의 연대 등 여성과 여성이, 또는 여성과 사회가 맺는 다양한 관계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따스하고 섬세한 문장들 사이사이에 가로놓인 여성문제, 계급문제, 억압적인 남성 중심적인 문화의 문제 또한 확인할 수 있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사람의 체온과 꼭 같은 온기로, 타인의 고통에도 자신의 감정에도 무감각해진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고 끝내 우리를 위로하는 작가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은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소설가가 등장했음을 보여주는,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호흡해나갈 젊은 소설가가 존재함을 알려주는 귀중한 사례에 해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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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그 여름
601, 602
지나가는 밤
모래로 지은 집
고백
손길
아치디에서

해설│강지희(문학평론가)
끝내 울음을 참는 자의 윤리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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